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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 예술적 성장, '시민케인'의 혁신, 영향력

by 모든 영화 선택은 이곳에서 2025.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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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웰스
오슨웰스

1. 천재 감독 <오슨 웰스>의 예술적 성장

오슨 웰스(Orson Welles)는 1915년 5월 6일 미국 위스콘신주 케노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감수성과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영화와 연극, 라디오 등에 전설적인 발자취를 남긴 영화감독이다. 부모님 중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아버지는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웰스는 다양한 예술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그의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웰스는 어린 나이에 커다란 상실감을 겪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실’과 ‘고독’의 주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 웰스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깊이 매료되어 고전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930년대 뉴욕에서 연극계에 입문한 웰스는 존하우스맨과 함께 "머큐리 극단(Mercury Theatre)"을 공동 설립하여 연극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레퍼토리 극장 회사로 연극과 라디오, 영화 등을 제작하였다. 이 극단을 통해 그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독창적인 연출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중 유명했던 작품은 1938년도에 방송했던 라디오 드라마 《우주 전쟁》(The War of the Worlds)으로 이 드라마로 인해 웰스는 대중적으로 크나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H.G. 웰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라디오 방송은 웰스가 감독, 각본, 제장, 연기까지 모두 도맡아서 했다. 마치 실제 외계인의 침공이 일어난 것처럼 리얼하게 구성되어서 생방송으로 전해진 소식에 수많은 미국인들이 실제로 외계인이 침략한 줄 알고 극도의 공포에 빠졌다. 이 전설적인 방송은 웰스에게 천재적 연출가라는 명성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영화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할리우드의 RKO영화사에서 웰스에게 영화제작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여 작품을 발표했는데 대표작이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이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웰스가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제작부터 모든 역할을 맡으며 탄생시킨 작품으로 뮤지컬 같은 느낌과 연극 같은 느낌을 담으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웰스의 영화 인생은 이 작품으로 일약 정점에 올랐지만, 이후 상업성과 예술성의 갈등 속에서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그의 삶은 늘 예술을 향한 열정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으로 가득했다. 오슨 웰스는 영화감독뿐 아니라 배우, 각본가, 제작자, 심지어 마술사로서도 활동했으며, 평생을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바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집념은 종종 상업적 실패와 맞물려 많은 미완성 작품을 남겼고, 그는 생애 대부분을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고군분투했다.

2. 《시민 케인》과 영화 언어의 혁신

《시민 케인》(Citizen Kane)은 단순히 오슨 웰스의 대표작을 넘어 영화사 전체를 바꿔놓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41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쓴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영화학계에서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다.

《시민 케인》은 허구의 언론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남긴 마지막 말, “로즈버드(Rosebud)”가 영화의 주요 미스터리로 작용한다. 기자들은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헤치며 케인의 과거를 추적하고 케인의 인생과 내면이 하나둘씩 밝혀진다. 이 비선형적 서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조였으며, 기존의 영화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인물의 회상을 통해 케인의 삶을 조각처럼 보여주며 관객 스스로가 인물을 완성해 나가도록 했다.

또한, 《시민 케인》을 통해 영화 언어에 혁신을 가져왔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기술적 특징은 '딥 포커스(Deep Focus)' 촬영 기법이다. '딥 포커스'촬영 기법이란 카메라를 비교적 가까이 있는 물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까지 모두 초점이 맞도록 촬영하는 기법이다. 화면의 전경과 배경을 동시에 선명하게 담아내는 방식으로, 관객이 화면 내에서 스스로 어디를 볼지 선택할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린 케인이 창밖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장면에서는, 창문 너머에서 놀고 있는 케인과 방 안에서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부모님의 대화가 동시에 선명하게 보인다. 이를 통해 웰스는 단순한 시청의 주체가 아닌, 관객을 ‘해석자’로 만드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웰스는 극적인 조명, 음향 효과, 저 각도저 각도 카메라 앵글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저 각도 촬영은 캐릭터의 위압감을 강조하거나 심리적 불안감을 부각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특히 찰스 케인의 권력과 몰락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음향 또한 웰스의 주요 도구였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공간의 깊이와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음향을 세밀하게 설계했다.

‘로즈버드’라는 상징은 인간 내면의 상실감과 순수성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결국, 《시민 케인》은 단순한 언론 재벌의 성공과 몰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외로움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개봉 당시 《시민 케인》은 언론계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의 갈등으로 인해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영화의 혁신성이 재평가되었고, 현재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 <오슨 웰스>의 영화적 유산과 영향력

오슨 웰스는 천재 감독임과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의 예술성을 확장시킨 인물이었으며 영화적 실험과 철학은 현대 영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시민 케인》 이후 웰스는 할리우드 시스템과의 충돌 속에서도 예술적 신념을 지키며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맥베스》(1948), 《오셀로》(1951)와 같은 셰익스피어 영화화 작업을 통해 문학과 영화의 경계를 허물었고,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에서는 3분 20초에 달하는 오프닝 롱테이크로 카메라 워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출 기법은 이후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 영화의 미학적 전환점이 되었다.

웰스의 영향력은 마틴 스코세이지, 스탠리 큐브릭,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같은 거장 감독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스코세이지는 웰스의 비선형적 서사 구조와 인물 심리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영화에 반영했고, 쿠폴라는 《시민 케인》을 “영화 제작의 바이블”로 평가하며 《대부》 시리즈에 웰스의 스타일을 차용했다.

웰스는 또한 ‘작가주의(auteur theory)’ 개념을 상징하는 감독으로 평가되는데 프랑스 누벨바그의 감독들은 그를 자신들의 사상적 선구자로 칭하며 영화감독이 연출가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철학과 미학을 담아내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웰스 자체의 삶은 영광과 실패가 교차한 비극적 서사였다. 상업적 실패와 스튜디오의 간섭으로 인해 미완성 작품들이 많았고, 생애 후반부에는 자금 부족으로 고군분투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 영화계에 영감을 주고 있으며, 오슨 웰스라는 이름은 ‘영화의 예술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웰스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영화학자, 비평가, 감독들에게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예술과 상업성의 경계,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창작물에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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